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문단 편집) === [[테르미도르 반동]] === > 음모에 가담한 자들은 만일 자신들이 성공한다면 극단적인 관용에 의해 현재의 상황과 대조를 이룰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잠시 혁명의 고삐를 늦춰보십시오. 바로 그때 여러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군사독재가 혁명을 탈취하고]]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당파들의 지도자가 국민의 타락한 대표체를 전복시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 >- 로베스피에르, 테르미도르 반동 전날 연설[* 기타 문단에도 적혀 있지만, 그 군사 쿠데타의 씨앗이 자신의 옆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을 몰랐다는 것이 로베스피에르의 한계이다. 이론과 현실이 괴리를 이뤄갔던 당시처럼.] >'''민주주의는 두 가지 과도함으로 망합니다. 통치하는 자들의 [[엘리트주의|귀족주의]]로 망하거나, 인민이 스스로 확립한 권위를 경멸함으로써 망합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모든 성공은 역설적으로 그를 몰락으로 이끌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공안위원회는 전쟁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며, 이는 더이상 비상조치의 필요성이 없어짐을 의미했다. 국민총동원에 의해 열성적인 상퀼로트들이 혁명군에 입대했고, 이는 파리 시민들 중 자코뱅에 대한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혁명군은 공세를 취해 남프랑스의 반란을 평정하고 벨기에를 정복하며 라인강 일대로 진격했다. 달리 말하자면 혁명군이 국내에 없어진 것이니 유사시에 자코뱅이 혁명군에 기댈 여지조차 없음을 의미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성공에 의해 파리 코뮌은 약화되었으며 코뮌과 의회의 충돌은 거의 사라졌으나, 이 역시 자코뱅의 최고의 기반이었던 [[파리 코뮌]]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역설적 상황에서 로베스피에르가 2차 국민공회 의장 재임기에 [[최고 존재의 제전]] (La fête de l'Être suprême)을 시도했다. 종래의 [[가톨릭]] 대신 [[이성(철학)|이성]]을 섬기자는 종교를 만든 것이다. 단, 이 시도는 로베스피에르가 이런 불안한 상황에 몰려서 혹은 몰렸는데도 했던 광인의 소행은 아니고 역설적으로 로베스피에르의 권위가 견고해지면서 시작한, 견제할 사람들이 다 사라져서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로베스피에르가 했기 때문에 비호받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서양에서는 유서 깊은 사상에 바탕을 둔 것은 맞다. 단, 로베스피에르가 좋아하고 깊은 영향을 받은 그리스 로마 시대도 일반인들은 최고 존재니 이성이니 신적 존재니 하는 건 신경도 안 쓰고 자기 믿을 신 알아서 믿다가 예수 믿기 시작한 것처럼 이런 사상은 절대 대중적이지 않다. 검소하게 살았다는 점에서 로베스피에르랑 비슷한 [[로마]]의 정치가 [[소 카토]]도 죽을 때, [[플라톤]]의《[[파이돈]]》을 읽으면서 자살했는데,《파이돈》내용이 딱 최고 존재이자 신적 존재인 [[이성(철학)|이성]] 같은 내용이다. 둘 다 비슷한 기행을 벌인 것인데, 즉 말하자면 로베스피에르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이 신앙을 믿으면 더 좋은 세상이 된다!"는 생각으로 실행한 것이지만 셋방에서 출퇴근한 프랑스 국가수반이 로베스피에르 단 한 명뿐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식적으로 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통 같은 사람들이 다 죽고 나서 할 수 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될 수가 없는 우스꽝스러운 일이니까.] [[사이비 종교]]인 것도 맞고.[* 이 종교 내용이 당시의 이 종교에 대한 극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이성의 신앙이라고 말하면서 갑자기 하늘이 열리며 로베스피에르가 정장을 입고 내려오는 공연 극장을 했다. 물론,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쟤는 지가 신이라고 된다고 생각하나? 미친 거 아니야?"라고 비판적인 시선이 대다수였고 이윽고 그가 초심을 잃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또한 공포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피로가 누적되었고, 무엇보다 로베스피에르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시점에 '순찰의원'들을 소환해서 지방에서 저지른 학살 등에 대해 규명하고 처벌할 뜻을 밝혔던 것이 치명적이었다. 1794년 7월 26일, 국민공회에서 로베스피에르는 누구의 이름도 거론하지 않은 채 지금 이 공회안에 반(反) 혁명파가 존재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장장 2시간이나 연설에서 비난을 퍼부었다. 결과적으로 이 연설은 로베스피에르 '''인생 최악의 악수'''가 되었다.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고 이 자리에 반(反) 혁명파가 존재한다고 선언하면서 공회에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이전처럼 나만 아니면 돼로 넘기지 못하고 오늘은 진짜로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와 불안감이 확산되었다. 의원들이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아 절박해지고 궁지에 몰려 초조해진 분위기 속에서 결국 탈리앵과 바렌이 단상에 뛰어올랐다. > 저는 어제도 그저께도 이런 고발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의원들에 대한 중상모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동료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 재앙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늪 속으로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감히 제안하겠습니다. 이 사악한 음모의 장을 이제 그만 걷어치워 버립시다! >---- > 장랑베르 탈리앵 (Jean-Lambert Tallien) 탈리앵의 외침에 이어 자코뱅을 제외한 의원들 대다수가 "반혁명파가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독재타도!"라고 외치며 공개적으로 반발하며 공회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공회를 빠져나온 로베스피에르는 파리 코뮌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의견불일치로 결정을 머뭇거리는 사이, 조제프 푸셰가 이끄는 '순찰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반 로베스피에르 세력을 결성했으며 지롱드파 의원들이 여기 결탁했다. 여기에 더해 다수파였던 국민공회의 비자코뱅 의원들이 이에 연합했으며, 공안위원회 소속의 상당수 의원까지 이에 가담하기에 이른다. 1794년 7월 27일, 국민공회는 그를 고발하였고, 그를 비롯한 일파들의 체포안도 통과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체포되면서 '''"공화국은 망했다. 악당들이 이겼다"'''라고 소리질렀다.[* 로베스피에르를 탄핵하고 반동을 주도한 바라스, 부르동, 푸셰, 탈리엥, 바렌 등은 본래 자코뱅 산악파의 일원으로 로베스피에르가 벌인 공포정치의 선봉 역할을 자처한 인물들이였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자신과 함께 공포정치를 벌인 공범들이 되려 자신을 물어뜯으니 로베스피에르가 끌려가면서 격분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보아도 로베스피에르가 벌인 공포정치는 선을 넘었다는 뜻이며 살기 위해 기회주의적 처세술을 선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나폴레옹에 적극 협력한 푸셰, [[반동주의]]자가 된 부르동, 나폴레옹을 몰아내려 왕당파와 손잡다가 축출당한 바라스를 제외하면 탈리앵과 바렌은 뼛속까지 공화주의자였기에 이어 쿠데타로 공화국의 실권을 쥔 나폴레옹과 협력할 기회가 있음에도 적극 거부해 둘 다 공직에서 퇴출된 후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가 체포된 후 파리 코뮌들에 의한 로베스피에르 구출작전이 일어나 파리 시청을 한때 점거하기까지 했지만, 통일된 지도부가 없어 테르미도르파가 지휘하는 국민군에 의해 쉽게 분쇄되었다. 7월 28일 오전, '''법정에서 선 로베스피에르와 그 동료들은 자신들이 정적들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되돌려 받았다.''' 사실 관계 조사와 변론의 기회는 없었다. 그들을 기소한 검사나 사형판결을 내린 판사 모두 이제까지 해왔던 절차를 이번엔 그대로 로베스피에르 일파에게 적용했고 만장일치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때 로베스피에르의 사형 판결을 내린 [[판사]] 푸키에 탱빌은 사실 [[공포정치]]를 상징한 혁명 재판소의 수장으로, 바로 직전까지 [[공포정치]]를 충실히 수행한 인물이였다. [[기회주의]]적 처신을 보인 그였지만 혁명 재판소가 곧 폐지되고 자신이 사형 판결을 내린 피해자 유족들에게 역으로 고발당했다.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실무자들처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자신은 그저 명령받은 대로 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항변했으나]] 소용없었고, 그대로 단두대로 끌려가 목이 잘렸다.] 그는 체포되는 과정에서 권총탄에 턱뼈가 날아가 말을 제대로 못 하게 되는 바람에,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 교도관들이 보기 흉한 그의 턱뼈를 붕대로 대충 고정시켜놓은 채 로베스피에르는 다음날 단두대 앞에 서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은 당대의 연설가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할까 기대했지만, 거칠게 떼어진 붕대 때문에 턱뼈가 달랑달랑거리는 와중에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처절한 비명뿐이었다. 어째서 그런 꼴로 잡혀왔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고발 이후 잡히기 직전 그는 자살하기 위해 턱에 총구를 대고 총을 발사하는데, 불행히도 죽지 않고 턱뼈만 날아갔다는 설이다. 권총으로 자살할 때 턱 밑을 대고 쏘면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뒤로 젖혀지기 때문에 대부분 저렇게 턱이나 코까지 날아가고 죽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파일:external/imgc.allpostersimages.com/the-arrest-of-robespierre.jpg]] 다른 한 가지는 당시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하기 위해 모인 [[프랑스 국가 헌병대]] 중 하나인 샤를앙드레 메르다(Charles-Andre Merda)라는 헌병 사병이 지근거리에서 그의 입에다 발포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토대로 한 기록화도 있다. 메르다는 이 사건 이후 출세해 [[나폴레옹 1세]] 치하에서 육군 기병 대령까지 올랐다가, [[보로디노 전투]]에 연대장으로 참전해 전사, 육군 준장으로 사후 추서됐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영화 중 하나는 두 가지를 절충, 자결하려고 입에 총을 넣었는데 군인이 막으려고 밀치면서 발포해 턱이 날아가는 것으로 나왔다. 물론 어찌되었든 로베스피에르는 턱이 망가진 것만으로도 이미 자기가 죽여 없앤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보다 훨씬 비참하게 죽는 신세가 되었다. 굳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턱뼈가 날아갔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고 말았고, 이렇게 된 상태라면 다른 사람이 유동식을 계속 목구멍으로 넣어주지 않으면 굶어죽게 된다. 로베스피에르가 너무 유명해져서 그렇지만 현장에 있던 여러 자코뱅파 지도자들이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는데, 로베스피에르의 동생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와 앙리오는 창밖으로 투신했고,[* 이들도 누가 창 밖으로 집어던진 거라는 말이 있다.] 르 바는 권총으로 머리를 쏘았다. 하지만 죽은 것은 르 바뿐이었고, 오귀스탱과 앙리오는 군중들에게 몇 시간이나 조리돌림과 구타를 당하면서 죽기 직전까지 갔으나 기요틴에서 죽여야 한다는 외침에 목숨만 건져서 감금되었다. 하반신이 마비된 쿠통은 인파에 떠밀려 계단 아래로 곤두박질쳤고, 생쥐스트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있어서 그나마 얌전하게 체포되었다. 어쨌든 테르미도르 10일 오후 5시,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 로베스피에르, 동생인 오귀스탱과 동료 쿠통,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등의 최초의 22인이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서 혁명광장의 단두대에 올랐다.[* 당통이나 에베르 등은 사형판결이 내려진 며칠 뒤에 형이 집행되었지만 로베스피에르 일파는 오전에 선고받고 오후에 집행이 되었다.] 2살 어린 여동생인 샤를로트 로베스피에르는 감옥에 갇혀있다 풀려나 목숨을 건졌으며, 후일 오빠인 막시밀리앙과의 친분관계가 돈독했던 당시 제1집정인 나폴레옹의 도움을 받아 그럭저럭 여유롭게 글도 쓰며 천수를 누리다 갔다. >오후 4시 정각, 사악한 행렬이 정의의 궁전 마당에 나타났다. 지금까지 파리에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은 없었다. 대부분의 구경꾼들은 로베스피에르가 타고 있는 수레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불행한 사람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로베스피에르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으며, 처형대로 옮겨질 때야 다시 눈을 떴다. 이 비참한 사내의 머리는 이제 끔찍하고 징그러운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 머리가 몸에서 떨어졌을 때, 사형 집행인은 그 머리채를 잡고 들어올려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끔찍한 장면이었다. >---- >로배스피에르의 처형을 지켜본 한 시민의 증언. 22인의 머리는 나무상자에 담겨 공동묘지에 던져졌고, 그 위에는 생석회가 뿌려졌다. 그 뒤를 이어 108명의 로베스피에르 추종자들 또한 처형되었고 프랑스 전역에 걸쳐 자코뱅파의 세력이 정리되었다. 반혁명분자 척결을 빌미로 프랑스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과거를 그대로 돌려받은 것이다. [[테르미도르 반동]]을 기점으로 프랑스 대혁명은 끝났다. 즉 막시밀리앙의 사망과 동시에 프랑스 대혁명이 끝났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나폴레옹 집권 이전까지를 혁명의 단계로 보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물론 혁명의 방향성이 바뀌면서 사실상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긴 하다. 실제로 나폴레옹 이전까지 집권한 총재정부가 왕당파와 자코뱅파의 중간에 속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다만 나폴레옹 전쟁을 대혁명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경우 [[나폴레옹 전쟁]]의 종말을 프랑스 대혁명의 끝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공식적인 혁명의 종결시기는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